일체유심조

동양 철학은 인도, 이슬람, 중국, 일본, 한국 등 아시아의 철학으로 유학, 노장철학, 불교 등이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 2025. 6. 1.

    by. 무진행

    목차

      불교 존재론: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사이에서
      불교 존재론: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사이에서

       

      1. 실체를 해체하는 사유: 불교 존재론의 출발점

      불교 존재론은 전통 형이상학과 본질적으로 다른 질문에서 출발한다.
      ‘무엇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보다, ‘존재는 어떻게 인식되고 구성되는가?’,
      혹은 ‘존재를 실체라고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핵심이다.
      이는 고대 인도 철학 전통 속에서 불교가 제기한 가장 급진적인 사유 전환이다.

      서양 형이상학이 ‘존재하는 것’의 본질을 찾고자 했다면, 불교는 존재를 해체하고,
      그 해체의 자리에 연기(緣起)와 공(空)이라는 관계적 논리를 배치한다.
      즉, 불교 존재론은 존재를 실체가 아니라 조건적 형성과 상호 의존의 산물로 본다.
      이러한 입장은 아비담마 불교의 분석적 철학에서 더욱 정밀하게 전개되며,
      모든 존재는 오온(五蘊)의 집합, 즉 색(물질), 수(감각), 상(지각), 행(의지), 식(의식)의 조건적 응집물일 뿐임을 강조한다.

      이러한 관점은 실재와 비실재, 존재와 비존재 사이의 경계를 흔든다.
      불교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말할 때, 그것이 자성(自性)적으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그것은 단지 조건에 따라 ‘이렇게 드러나는’ 것일 뿐, 고정된 실체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때 불교는 존재를 인식의 대상이자, 집착의 기원이 되는 허상으로 보고,
      그 허상을 걷어내는 존재론적 통찰을 통해 해탈의 문을 연다.

       

      2. 유와 무의 동시성: 존재와 비존재를 넘나드는 논리

      불교 존재론의 가장 독특한 특징은 ‘유(有)’와 ‘무(無)’를 이분법적으로 나누지 않는다는 점이다.
      『중론(中論)』에서 나가르주나는 “유도 아니요, 무도 아니다”라고 선언하며,
      존재는 유도 무도 아닌 ‘중(中)’의 차원에서 파악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사유는 중도(中道)의 존재론이며, 유와 무의 사이에서 형성과 소멸의 조건성을 응시하는 철학이다.

      이는 존재를 단지 ‘있는 것’으로 간주하지 않고,
      어떻게 발생하고, 조건 지어지고, 사라지는지의 과정 자체를 존재로 본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유는 무로 가고, 무는 유를 낳는다. 예컨대 ‘꽃’은 지금 눈앞에 피어 있지만,
      그 꽃의 실체는 씨앗, 햇빛, 물, 시간, 토양 등 비꽃적인 요소의 총합이다.
      이처럼 불교 존재론은 존재 자체가 타자들의 네트워크로 구성된 환영적 현현임을 밝힌다.

      여기서 공(空)의 개념은 존재와 비존재의 경계 자체를 해체한다.
      ‘공하다’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아니라,
      고정된 실체가 없고, 상호 의존적이며, 유동적이라는 의미다.
      따라서 불교에서 존재는 항상 무(無)의 여백 속에서만 잠시 드러나는 현상이며,
      그 자체로 붙잡거나 고정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존재는 고정되지 않은 상태로 존재한다—바로 이것이 불교 존재론의 핵심 역설이다.

       

      3. 실재를 구성하는 마음: 유식학의 존재 해석

      불교의 유식학(唯識學)은 존재의 문제를 마음의 구조로 전환한다.
      즉, ‘존재란 무엇인가?’보다 ‘존재는 어떻게 마음에 드러나는가?’를 묻는 학문이다.
      유식학에 따르면,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세계는 외부에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식(識), 즉 인식 작용에 의해 구성되고 투영된 것이다.

      유식학은 존재의 실재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모든 존재는 마음속에서 생성된 현상적 실재이며,
      그 실재는 각 식(識)의 조건, 아뢰야식(무의식)의 종자(種子),
      그리고 말나식의 자아의식에 따라 달리 드러난다.
      결국 존재는 마음의 상태에 따라 드러나는 조건적 형상이며,
      어떤 것도 객관적이고 절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사고는 현대 인지심리학이나 구성주의 인식론과도 유사하다.
      ‘있는 것’은 내가 그렇게 인식할 조건을 갖췄을 때만 의미를 가지며,
      그 외에는 무의미하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된다.
      불교 존재론은 이렇게 ‘존재’를 경험의 지각 작용, 마음의 조건, 의식의 흐름에 따라 구성되는 사건으로 보며,
      존재에 대한 고정관념을 근본부터 해체하는 심리 존재론을 전개한다.

       

      4. 존재의 중간 지대: 색즉시공(色即是空)의 존재론

      불교 존재론의 또 다른 핵심은 바로 ‘색즉시공(色即是空), 공즉시색(空即是色)’의 명제다.
      이는 ‘물질(色)은 곧 공(空)이요, 공은 곧 물질’이라는 역설적 선언으로,
      존재와 비존재의 경계, 실체와 환상의 구분, 고정과 유동의 이분법을 무화(無化)한다.

      ‘색즉시공’이란,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물질적 대상이
      자성 없이, 조건에 의해 발생했다는 점에서 공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공즉시색’은, 그 공함이 단지 공허가 아니라, 그 자체로 형상을 낳는 가능성의 장(場) 임을 의미한다.
      이 개념은 존재를 실체가 아니라 관계적 발생성과 잠재성의 흐름으로 이해하도록 인도한다.

      이때 존재란 단순히 ‘무엇인가 있다’가 아니라, 무엇인가가 잠시 그렇게 드러나는 것이다.
      그 드러남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조건적 현상이며, 그 현상은 언제나 변화하고 있다.
      색즉시공은 따라서 존재와 비존재를 함께 껴안는 사유이며,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에 있는 상태로서의 존재를 성찰하게 만든다.

       

      5. 디지털 시대의 존재론: 알고리즘, 데이터, 그리고 공(空)

      오늘날의 세계는 실재와 허구의 경계가 끊임없이 흐려지고 있다.
      가상현실, 인공지능, 메타버스는 존재를 디지털 신호와 알고리즘적 결정 구조로 전환시키며,
      우리는 점점 더 ‘물리적 존재’가 아닌,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실체 없는 존재로 이동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일수록 불교의 존재론은 더욱 강한 철학적 함의를 띤다.

      예를 들어, SNS 속 정체성은 자아의 실체가 아닌, 상호작용과 반응, 알고리즘에 의해 구성된 ‘조건적 자아’다.
      이러한 디지털 존재는 ‘색즉시공’의 원리를 반영한다.
      실체는 없지만 조건이 맞으면 존재하는 것처럼 작동하며,
      그 존재는 언제든 해체되고 다시 생성될 수 있다.

      인공지능이 만들어낸 이미지, 텍스트, 영상 또한
      실재처럼 보이지만 데이터 조건에 따라 생성된 공(空)의 형상이다.
      불교 존재론은 이 흐름 속에서 실체 없는 존재의 조건성과 무상성을 꿰뚫는 통찰을 제공하며,
      현대 사회의 디지털 인간, 가상 존재, 알고리즘 윤리를 사유하는 데 핵심적 사유 기반이 된다.

      결국 불교 존재론은 ‘있는 것’과 ‘없는 것’이라는 이분법을 넘어,
      그 사이에 머무는 유동적 존재의 방식,
      그리고 그것을 관조하는 지혜의 존재론으로 자리 잡는다.
      ‘있는 것은 공하고, 공한 것은 다시 존재를 낳는다.’
      이 역설 속에서 우리는 붙잡을 수 없는 존재의 흐름을 고요히 관찰하는 자리로 나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