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체유심조

동양 철학은 인도, 이슬람, 중국, 일본, 한국 등 아시아의 철학으로 유학, 노장철학, 불교 등이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 2025. 6. 9.

    by. 무진행

    목차

      서론 ― 종은 공간을 울리고, 마음을 깨운다

      불교 사찰에서 범종(梵鐘)은 단순한 청각 신호를 넘어선다.
      그 소리는 공기 중으로 퍼져나가는 진동이 아니라,
      공간을 울리고 시간마저 흔들어 놓는 존재론적 파동이다.
      범종의 울림은 단순히 '소리'로 끝나지 않으며,
      그 소리를 수용할 수 있는 건축적 장치, 범종루(梵鐘樓)와 결합하여
      청각적 수행을 위한 입체 구조물로 승화된다.

      이 글에서는 범종루라는 건축 구조가
      어떻게 불교의 소리 철학을 공간적으로 구현하는지를 살핀다.
      종소리의 지향성, 울림의 방향, 벽의 재료, 지붕의 곡률, 바람의 흐름 등
      모든 요소는 하나의 청각적 기하학으로 조직되어 있다.
      이는 불교의 수행 체계가 청각을 단순한 감각으로 보지 않고,
      깨달음의 매개로 활용한 이유를 건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1. 청각적 진동으로 구현된 ‘공’: 종소리의 무지향성 철학

      청각적 진동으로 구현된 ‘공’이라는 개념은 범종의 소리에서 출발한다.
      범종의 소리는 일정한 방향을 갖고 퍼지는 것이 아니라,
      360도 무지향성으로 확산되며 모든 존재에 동등하게 침투한다.
      이는 불교의 핵심 사상인 ‘공(空)’의 공간적 은유로 작용한다.

      소리는 보이지 않으며, 잡히지도 않지만,
      공간 전체를 관통하고, 차별 없이 존재를 통일시키는 작용성을 갖는다.
      범종루의 중심에 매달린 종은 이와 같은 무차별 진동체로 존재하며,
      이 종소리를 둘러싸는 공기, 나무 기둥, 벽, 지붕은 그 무형의 소리를 형상화하는 외피다.

      즉, 범종루는 ‘공’을 울리는 건축 구조다.
      ‘무지향의 사운드’는 불교의 평등성과 무집착성을
      감각적으로 체험하도록 유도한다.
      청각은 시각보다 훨씬 비분할적이기에,
      ‘공’을 설명하기에 가장 적합한 감각 도구가 된다.

       

      2. 범종루의 음향 기하학: 진동이 설계하는 사유의 곡면

      범종루의 음향 기하학은 단순한 종각이 아니라,
      진동을 설계하고 유도하는 기하학적 사유 구조임을 보여준다.
      범종루의 구조는 대부분 2층 누각으로 구성되며,
      상층부는 종이 매달려 있고, 하층부는 빈 공간으로 두거나
      풍류를 흘려보내는 설계로 지어진다.

      지붕의 기울기, 천장의 곡률, 기둥 간격은 모두
      소리의 반사, 흡수, 굴절을 조절하는 역할을 한다.
      이때 음향은 직선이 아니라 곡면으로 휘어지며 공간을 감싼다.
      그 결과, 범종루는 청각적 곡선 공간이 된다.

      특히 범종의 진동은 단순한 소리의 전달이 아니라,
      수행자의 몸과 공명하는 구조로 작용한다.
      이 진동은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라,
      가슴, 복부, 피부 전체로 받아들이는 심신 통합 감각으로 작동한다.
      범종루는 이 감각을 최대치로 증폭시키기 위한 사유적 설계물이다.

       

      3. 시간의 문을 여는 음향 장치: 하루의 경계를 울리는 리듬

      시간의 문을 여는 음향 장치로서 범종은
      하루의 시작과 끝을 분절하는 시간 구조의 매개체다.
      사찰에서는 새벽 4시, 해질녘, 의식 전후에 종을 울리는데,
      이는 단지 신호를 위한 행위가 아니라
      시간을 다시 인식하게 만드는 명상적 타격이다.

      이러한 타격은 하루라는 흐름을 '찰나'로 전환시켜,
      우리가 사는 시간을 ‘지속’이 아닌 ‘경계의 반복’으로 인식하도록 한다.
      범종루에서의 울림은 시간의 중심을 찌르는 순간이자,
      무상(無常)을 환기시키는 사운드 철학으로 기능한다.

      사찰의 공간 속에서 범종루는
      시간의 흐름을 사운드와 공간의 교차점에서 포착하게 만든다.
      즉, 시간은 시계가 아니라 종소리로 측정되며,
      그 종소리는 멈추지 않는 ‘지금’을 울리는
      현존의 리듬학이다.

       

      4. 청각적 감응 수행: 듣기를 통한 불이(不二)의 구현

      청각적 감응 수행은 듣는 행위 자체가 수행이자 깨달음의 방식이 될 수 있다는 불교적 인식에서 출발한다.
      범종의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외부의 자극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의 울림을 깨닫는 자기 반향의 여정이다.

      불이(不二)는 이원성을 초월한 하나의 상태를 말한다.
      즉, 주체와 객체, 듣는 자와 들리는 소리가
      분리되지 않고, 하나의 진동 안에서 녹아드는 순간이다.
      범종루는 이 불이의 상태를 공간적으로 구현한다.

      듣는 자는 어느 순간 자신이 종소리와 하나가 되었다는 감각을 느끼게 되고,
      그때의 침묵은 진정한 언어가 된다.
      이는 선종에서 자주 말하는 ‘말 없는 법문’, ‘소리 없는 설법’의 청각적 실현이다.

       

      5. 울림의 윤회 구조: 사라지는 소리와 머무는 공명

      울림의 윤회 구조는 종소리가 사라짐으로써 오히려 지속적인 사유를 발생시키는 역설을 보여준다.
      범종의 소리는 단일 사건이 아니라, 사라지는 파동이 만든 여운의 구조이다.

      이 여운은 공간을 계속 진동시키며, 사라졌으나 여전히 ‘존재하는’ 방식으로 불교의 윤회론과 유사한 구조를 갖는다.
      즉, 종소리는 죽지 않고, 다른 공간, 다른 감각, 다른 시간에서 계속 순환한다.

      범종루의 건축은 이러한 윤회적 울림이 최대한 오래, 멀리, 깊이 퍼질 수 있도록 구성된다.
      이는 결국 불교적 ‘무상’과 ‘공’의 사상을, 청각적으로 구성한 건축의 미학이다.

       

      불교 종소리의 공간화: 범종루 건축과 청각적 기하학

       

      맺음말 ― 범종루는 듣는 법문이며, 소리는 머무는 경전이다

      범종루는 종소리를 울리기 위해 만들어진 건축물이 아니라,
      소리를 철학적으로 해석하고, 공간적으로 구체화한 수행 구조물이다.
      소리는 즉시 사라지지만, 그 울림은 머물고,
      그 여운은 우리의 몸과 마음에 불교적 사유를 침전시킨다.

      건축은 흔히 시각을 위한 예술이라 말하지만,
      범종루는 청각을 위한 사유의 집이며,
      듣는 자가 주체가 되는 청각적 해탈의 무대다.

      사찰에 울리는 종소리를 다시 듣자.
      그것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공간을 울리고 마음을 깨우는 진리의 진동이다.